영국 거주 일본인 수필가가 쓴 에세이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성공하는 조직에는 늘 '키 플레이어'(Key player)들이 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0년간 영국을 다스린 토니 블레어 정부에도 그런 핵심 인사가 있었다. 정부의 간판은 말쑥하고, 젊으며, 탁월한 연설 능력을 지닌 옥스퍼드 출신의 블레어 총리였지만, 그 뒤에는 앨러스터 캠벨 전 공보수석이 있었다. 그는 '처칠 이후 최고의 연설가'라는 평판을 얻은 블레어의 연설문을 쓴 주인공이자, 막후 실세였다. "언제봐도 조증 상태"인 블레어가 빛이라면 "우울한 기질"의 캠벨은 정부의 그림자였다. 블레어의 명연설문은 사실 우울한 기질의 전 저널리스트(캠벨)가 중압감에 시달리며 울면서 쓴 글에 불과했다.
화려한 블레어의 언사 속에 영국은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 보였지만, 그건 겉모습에 불과했다. 외부적으로는 미국과 함께 이라크 전쟁의 주범이라는 비판에 줄곧 시달렸고, 내부적으로는 재정 적자에 휘청였다. 보수화된 노동당은 긴축재정을 시행했다. 민영화의 바람도 거세게 일었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졌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됐다. 노동당의 집권이 끝나고 2010년 보수당이 들어서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일본인으로 영국에서 거주하는 수필가 브래디 미카코가 쓴 '밑바닥에서 전합니다'(다다서재)는 신자유주의가 상륙한 영국의 풍경을 스케치한 에세이다. 1990년대 말부터 2015년까지 변화하는 영국의 모습을 주로 노동자의 시각에서 그렸다.
저자는 젊은 시절 펑크에 심취해 혈혈단신으로 영국에 건너가 아일랜드 이주민 집안 출신 남자와 결혼했다. 펑크족이었던 남편은 돈이 없었다. 저자는 빈민가에서 생활하며 애를 낳았다.
빈민가는 잿빛이었다.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자랑하며 흥청망청 써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빈민가 아이들도 희망을 찾아 집을 나섰지만, 대부분은 절망한 채 엄마·아빠가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보이던 아이들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다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같은 집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부모의 집을 뛰쳐나가 자립하거나 여자 친구를 임신시켜 가정을 꾸린 사람들도 이런저런 것들을 깨뜨리고 금세 본가에 돌아온다."
사회는 점점 험악해졌다. '칭크'(Chink)라는 동양인 비하 발언이 거리에서 자주 들렸고, 반이주민 정책, 반 유럽연합(EU)에 대한 지지의 목소리도 커졌다. 이주민과의 일자리 싸움에서 밀린 노동자 계급은 극우로 돌아서기도 했다. 트럭 운전사인 저자의 남편도 극우 정당에 투표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처럼 혼란스러운 빈민가의 풍경을 여과 없이 묘사한다.
이런 혼탁한 상황에 관한 글만 책에 실린 건 아니다. 대중문화, 미국 정치 등 다양한 이야기를 책은 소개한다. 이 중 천재 아티스트였으나 형편없는 "백수"와 사랑에 빠져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내다 버린" 영국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1983~2011)에 관한 글은 눈길을 사로잡을 만하다.
김영현 옮김. 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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